지금까지 <이산>에 소개된 정조의 여인들. 이들은 결과적으로 왕실의 대통을 잇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 MBC
요즘 안 그래도 바쁜 정조 임금이 후사를 얻는 문제로 인해 성심(聖心)을 다치고 말았다.
발칙한 원빈 홍씨의 거짓말(가짜 임신)이 오빠 홍국영의 또 다른 거짓말로 이어지면서 왕실은 일대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말았다.
원빈에게 첫날 밤 소박이라는 치욕을 안겨준 정조. 평소 원빈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정조도 원빈의 복중 용종(龍種, 왕족의
의미)이 행여 잘못되지는 않을까 하고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도 정조 임금은 24년이라는 재위기간에 비해 자녀가 매우 귀한 편이었다.
효의황후와 원빈 홍씨에게서 자녀를 얻지 못한 정조는 정조 4년(1780)에 화빈 윤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지만, 실록에서는
화빈이 임신을 했기 때문에 산실청을 설치했다고만 기록했을 뿐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지 않고 있다.
뭔가 잘못된 모양이다.
성송연의 실제 모델인 의빈 성씨의 경우에는 문효세자와 옹주 하나를 낳았지만, 아들은 다섯 살 때에 홍역으로 사망하고
딸은 생후 1년도 안 되어 죽고 말았다.
원빈·의빈 외에도 여러 명의 후궁들을 맞아들였지만, 그들에게서도 별다른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정조 14년인 1790년에 순조가 태어나기 전까지 정조는 계속해서 심각한 '자식 가뭄'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서 잠시 여담을 소개하면, 정조의 차남인 순조 이강(李?)의 호가 좀 재미있다.
본래는 재미있는 호가 아니었지만, <이산>의방영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 순조의 호는 순재(純齋)였다.
이 순재. 이름이 아니라서 이순재라고 붙여 쓸 수는 없지만, 아무튼 순조 임금은 '이 순재'였다.
다시 심각한 이야기로 돌아가서, 여러 명의 후궁을 두고도 2남 2녀밖에 못 낳았을 정도로, 게다가 그중 1남 1녀는 일찍 사망
했을 정도로 정조는 자식이 매우 귀한 임금이었다.
사실, 정조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많은 왕들이 자식 가뭄 즉 후사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처럼 선거를 통해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고 왕이 후계자를 직접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던 전통시대의 산물이었다.
건국 초기의 활력, 공신들과의 다중적 정략결혼 등이 원인이 되어 통치자 한 명이 수십 명의 자식을 낳기도 했던 조선 초기와는
달리, 후대로 가면 갈수록 조선왕실에서는 자손을 보기가 점차 힘들어졌다.
이 점은 오늘날의 일본 왕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왜 왕들은 자녀를 많이 낳지 못한 걸까?
조선 팔도에서 올라온 온갖 진귀한 음식을 매일 먹으면서, 또 후궁 외에도 수많은 궁녀들을 옆에 끼고 살면서 왜 자식들을
'팡팡' 낳지 못한 걸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의문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 듯하다.
궁궐이라는 환경 자체가 왕의 자녀가 무사히 태어나기에는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는 점, 왕들이 바쁜 공무로 인해
육체적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는 점, 왕들이 일상생활 중에도 항상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 등을
대표적으로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 이곳 주인의 삶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제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어떤 한국사 논문에서는, 조선시대의 왕이 여자와 잠자리를 가질 때에 여러 명의 궁녀들이
병풍 뒤에서 왕을 지켰다고 기록한 바 있다.
심지어는 내시들이 "옥체를 위해 이제 그만하시지요"라며 잠자리까지 일일이 간섭했다고 한다.
또 예전에 어느 중국 영화에서는, 환관(내시)이 화장실까지 따라가서 왕의 '용무'를 시중드는 장면을 보여준 적이 있다.
콧구멍을 활짝 개방한 채 매우 태연한 표정으로 "오늘은 색깔이 괜찮으시네요"라며. 이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누군가의
시중, 나쁘게 말하면 누군가의 감시를 받고 살았으니, 왕들이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정신적 스트레스만으로도 건강에 상당한 무리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정신적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육체적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각종 의식에 참석하고 수많은 사안들을 처리해야 할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군사반란도 예방해야 하기 때문에,
단 하루도 편히 쉴 틈이 없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즘 한국 대통령들은 임기 5년만 채워도 흰머리가 생기고 또 어떤 사람은 청와대 나서자마자 “아! 기분 좋다!!”며 즐거워하는데,
옛날 왕들은 그런 생활을 5년도 아니고 죽을 때까지 했으니, 거기서 받는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즉위하기 전부터 오랫동안 그런 연습을 하며 살았으니, 그들은 이미 상당히 지친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왕들이 자식을 많이 못 낳은 이유를 정확히 해명하기는 힘들겠지만, 우리는 위와 같은 왕들의 ‘직업병’과 그들의 생식능력
사이에 일정 정도의 인과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드라마 <이산>을 통해서 지켜본 바와 같이, 정조 임금은 어릴 때부터 막중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았던 임금이다.
그리고 군주가 된 뒤에는 역대 어느 왕보다도 바쁘고 고든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안경을 쓴 정조 임금의 이미지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항상 공문서를 읽든가 아니면 책을 읽든가 하는 사람이었다.
평생 그렇게 바쁘고 고되게 살았으니, 그 몸이 온전할 리 없었을 것이다.
4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걸 보아도 그 점을 알 수 있을것이다.
암살당한 게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역사는 추측이 아니라 실증에 근거해야 하는 게 아닐까?
별 근거도 없이 세상 모든 일을 음모니 암살이니 하는 쪽으로만 몰아간다면, 우리네 인생이 너무 삭막해지지 않을까?
정조 사망을 가져온 객관적이고 확실한 원인은 바쁘고 고된 공무였다고 보는 게 비교적 타당할 것이다.
이처럼 바쁘고 고된 삶을 산 정조 임금. 그가 중전 외에 여러 명의 후궁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녀 가뭄에 시달린 것을
보면, 그 원인은 아무래도 여자 쪽이 아닌 남자 쪽의 건강문제에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드라마 속의 원빈 홍씨는 효의황후를 자극하기 위해 "원자를 못 낳으면 내 무슨 낯으로 살리요!"라고 말했지만, 정작 낯을
들기 힘든 사람은 따로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런 정조의 고민, 이런 왕실의 고민을 ‘한 큐’에 해결해준 여자가 있었다.
정조의 또 다른 후궁인 박 수빈 즉 수빈 박씨(1770~1822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드라마 <이산>에서 아직은 '불펜 대기 중'인 구원투수다.
좌찬성 박주원의 딸로서 정조 11년(1787)에 후궁이 된 그는 입궁 3년 만인 1790년에 ‘이 순재’를 낳아 왕실의 대통을 잇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숙선옹주라는 딸도 낳았다.
스물다섯 살의 정조가 즉위하던 해에 겨우 일곱 살에 불과했던 수빈 박씨가 훗날 궁에 들어가 정조의 소원을 성취해준 것이다.
아들(순조)이 왕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수빈 박씨에 대한 실록의 평가는 매우 좋은 편이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 해도 수빈 박씨는 상당히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소에 입이 무겁고 또 매우 검소했다고 한다.
아들 이강이 세자로 책봉된 이후에 은밀한 뇌물공세가 시작되자 뇌물공여자들을 의금부에 집어넣을 정도로 성격도 매우
엄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조야에서는 수빈 박씨를 현빈(賢嬪)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훗날 드라마의 소재가 되려고 그랬는지, 정조의 주변에는 원빈·현빈·순재처럼 유명 연예인들을 닮은 명칭 또는
별칭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아무튼 최근 <이산>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정조의 후사 문제. 이 문제는 결국 훗날 입궁한 수빈 박씨에 의해
'명쾌하게' 해결되었다. 정조가 집권 중반기에 들어선 이후의 일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의빈 성씨가 낳은 문효세자는 어린 나이에 죽었으므로, 정조와 조선왕실의 고민거리를 해결해준 구원
투수는 결국 수빈 박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손자를 애타게 기다리는 혜경궁 홍씨.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정조 이산.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출처-오마이뉴스 김종성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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