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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 맨발로 손님 절 받았다? ..... [2008/03/18]

이미피더 2009. 3. 29. 00:07

 

 

홍국영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곤룡포는 정조가 입고 임금 노릇은 홍국영이 하는 것 같다.

조선 팔도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집중되고 있다.

하는 짓이 오죽 위험천만했으면, ‘가상의 악당’ 장태우마저 하도 기가 차서 정조에게 그의 난행을 고해 바쳤을까?

 

드라마 <이산>은 홍국영에 대해 그나마 호의적인 편이다.

정조 즉위 이후 홍국영이 자행한 온갖 일들만 다루어도, <주몽>이나 <태왕사신기> 못지않게 아주 재미있는 국민 드라마가 나올지 모른다.

그런 드라마에서 배울 것이라곤 딱 하나다. 권력 잡은 뒤에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조 등극 이후의 불과 몇 년 동안 홍국영이 저지른 ‘작태’. 작태, 좀 심한 표현이지만, 아래 내용을 읽다 보면 그 표현도 오히려 부족

하다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그 ‘작태’ 중 여섯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청와대 바로 옆에 '청와대 분점'을 내다

정조 등극 후에 일약 제2인자의 반열에 오른 홍국영. 도승지와 숙위대장을 겸한 그는 모든 군국(軍國) 기무를 자기 손으로 직접 결정했다.

비서실장 겸 경호실장의 신분으로 말이다.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보다도 더 대단한 권세를 부렸다.

자기 손을 거치지 않으면 주요 국정이 집행되지 못하도록 했으니, 그를 ‘소통령’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조정의 삼정승·육판서는 물론이고 지방관들까지도 홍국영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의 말을 거역했다가는 어떤 재앙을 입을지

몰랐기 때문에 누구든지 홍국영 앞에서는 ‘일단 고개 숙여!’였다고 한다.

 

권력의 분점을 내용으로 하는 탕평정치에 심혈을 기울이는 자신의 주군을 외면한 채 자기가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를 열려고

했으니, 홍국영의 전횡을 지켜보던 그 몇 년 동안 정조 임금이 속으로 얼마나 참고 또 참았을까?

홍국영의 집무실이 정조의 거처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으니, 청와대 바로 옆에 ‘청와대 분점’을 따로 낸 것과 뭐가 달랐을까?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에 한국인들은 “중앙정보부 요원이 들을지 모르니, 입조심들 하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도 사적인 대화에서 대(對)정부 비판을 조심하곤 했다.

 

정조 즉위 직후의 조선사회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있었다. 일반 백성들까지도 사적인 대화에서 감히 홍국영을 들먹이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는 그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이름 대신 ‘지신사’(도승지의 별칭)라는 표현으로 홍국영을 가리킨 것이다.

 

그가 얼마나 횡포를 부렸으면 그런 현상이 생겼을까?

일반 백성들이 이야기하는 곳에 홍국영이 나타날 리 없는데도, 홍국영은 그만큼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디든 존재하면서 온 백성을 감시하는 존재. 영어로 하면, 그는 유비쿼터스(ubiquitous)한 존재였다.

 

전주 이씨와 풍산 홍씨는 동격?

사도세자에게는 혜경궁 홍씨, 숙빈 임씨, 경빈 박씨라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다.

여기서 홍씨는 의소세자(어릴 때 요절)와 정조 이산을 낳았고, 임씨는 은언군과 은신군을 낳았다.

 

누이인 원빈 홍씨가 정조 3년(1779)에 사망하자, 홍국영은 은언군의 아들인 이담(정조의 조카)을 죽은 누이의 양자로 삼았다.

이담을 정조의 후계자로 삼아 자신의 세도를 연장하기 위한 장기적 포석이었다.

 

그런데 원빈의 양자가 된 이담에게 부여된 군호는 완풍군(完豊君)이었다. 완풍이란 군호는 홍국영의 작품이었다.

여기서 완풍이란 표현을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완’은 조선 왕실의 본관인 전주(완산주)를 가리키는 것이고, 풍은 홍국영의 본관인 풍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완풍이란 말이 전주 이씨와 풍산 홍씨를 동격에 놓는 ‘뼛골 오싹한’(<정조실록> 기록) 표현이었다고 한다.

주군의 가문과 자신의 가문을 동격에 둔 홍국영, 그는 걸어서 어디까지 가고자 했을까?

 

 

나도 ‘궁녀’들을 끼고 산다?

 

홍국영이 근무한 숙위소는 임금의 거처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둔 곳이었다. 그만큼 가까웠다.

그렇기 때문에 홍국영은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홍국영은 그것을 못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홍국영은 바로 옆에 있는 정조 임금을 거의 의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경비병들을 부를 때에도 마치 자기 집 하인을 부르듯이 큰 소리로 불렀으니, 안경 끼고 조용히 공부하던 정조 임금이 속으로 얼마나

신경이 쓰였을까? ‘고시생’ 옆에서 떠드는 철없는 동생 같았을 것이다.

 

그보다 더 황당한 것은 홍국영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여자들을 끼고 살았다는 점이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그는 숙위소에 의녀나 침선비(바느질하는 여자)를 두고서 “어지럽고 더러운 짓을 자행”했다고 한다.

 

궁녀들을 끼고 살던 연산군을 흉내낸 것이다. 바로 옆에 있는 주군을 존경하고 두려워했다면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록 편찬자들은 홍국영에 관해 참 별 것을 다 기록했다.

 

어찌 생각하면 너무 편파적이지 않나 싶을지 모르지만, 사관들이 홍국영의 사소한 습관까지 기록했다는 것은 그만큼 홍국영의

일거일동이 선비들의 눈에는 ‘상놈’보다 못하게 비쳐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비는 홀로 있을 때에도 몸가짐을 올바로 해야 한다는 것이 유학에서 말하는 신독(愼獨)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기숙사인 양현재에는 지금도 신독의 신(愼)을 딴 ‘신사실’이라는 방이 있다. 예전에 조광조인가 누군가가 그 방에서

살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홍국영은 그런 신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홍국영은 자신의 집무실에 높은 평상을 갖다 놓았다고 한다.

보통 의자보다 높은 침상에서 편한 자세로 근무한 것이다. 그 평상은 침대 겸 의자의 기능을 한 것이다.

 

더 가관인 것은, 버선도 신지 않은 상태에서 평상 위에서 다리를 쭉 뻗고 있었다는 점이다.

손님이 찾아와서 절을 해도 그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맨발로 손님의 절을 받는 선비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심지어는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재상들이 찾아와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높은 평상에서 거만한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 있는 홍국영을 향해 늙은 재상들이 절을 올리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맨발로 앉아 있는 젊은 하급자에게 절을 올리는 나이 많은 상급자. 정말 가관이었을 것이다.

 

 

 

▲ 정조에게만 고개를 숙인 홍국영. 다른 사람에게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드라마 <이산>.나에게 어른은 없다

 

홍국영은 누구에게든 함부로 말을 했다고 한다. 물론 정조 임금은 빼고 말이다.

실록 기록에 따르면, 그가 평소에 하는 말은 거의 다 상스럽고 더러운 말투였다고 한다.

 

드라마 <이산>의 홍국영은 그나마 신사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자신보다 나이와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도 그런 언사를 사용했다고 한다.

 

나이 많은 사람을 꾸짖기도 하고 능멸하기도 하고 말이다. 장유유서를 존중하는 사회에서 홍국영의 그런 행동이 얼마나

한심하게 비쳐졌으면, 사관들이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 일일이 다 기록했을까?

 

지금까지 소개한 몇몇 사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홍국영은 여한 없이 권세를 부린 사람이었다.

하늘을 나는 새까지 떨어뜨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지만 그의 매너는 땅에 뚝 떨어졌다.

바로 그것이 홍국영의 조기 몰락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권세도 하늘을 찌르고 매너도 하늘을 찔렀다면 그의 권세가 조금은 더 오래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하지 못했다.

바로 옆에서 4년간 홍국영을 조용히 지켜본 정조 임금. 홍국영의 일거일동을 아무 말 없이 유심히 관찰한 정조 임금.

그 정조 임금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가상의 인물 장태우가 나와서 “쟤 좀 어떻게 해봐요!”라고 요구하지 않더라도 정조 임금도 다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