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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짝패 정조와 정약용 첫만남, 실제 역사에선...[2008/05/07]

이미피더 2009. 4. 16. 23:50

 

 

 

 

MBC 월화사극 ''이산''의 67회 방영분에서 다산 정약용(송창의 분)이 규장각 관원들로부터 고리대금업의 폐해를 전해 듣고 직접암행에

나선 정조 이산(이서진)과 인상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역사, 지리, 법학, 의학, 과학 등 전방위 학문에 도통했던 정약용은 정조시대 포스트 체재공(한인수 분) 체재를 확립할 인재로 지목되며

정조의 특별한 아낌과 사랑을 받았던 신하다.

 

정조가 정약용을 특별히 아꼈던 것은 그의 개혁 성향이 정조의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에서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월화드라마 ''이산''에서 그려진 것처럼 정조가 성균관 유생들에게 내린 질문에 대한 답안으로 올린

정약용의 글을 통해서 이뤄졌다.

 

정약용은 20살 전후에 소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들어와 대과를 준비하는 동안 정조와 만나게 되는데 당시 정조는 학문 실력이 인정되면

출신 지역, 당색. 관직자나 일반 유생이든 상관없이 특별한 관심을 표명했다.

 

정조는 인재발굴을 위해 종종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 시험을 보았고 정약용은 그 시험 대부분에서 1등을 차지하며 정조의

눈에 띈다.

 

월화드라마 ‘이산’에서 그려진 것처럼 중용을 읽고 느낀 의문점 70개 조에 대한 답변을 통해 탕평과 크게 하나가 되는 인간관계를 설명

하도록 한 특별 시험에서 정약용의 답안은 정조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

 

당시 정약용은 정조가 인간 성론을 주제로 극비리에 써놓은 저술 ‘사칠속편’과 상당부분 흡사한 내용의 답안을 제출해 정조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남인은 퇴계설, 서인은 율곡설을 따르던 당시 상황에 비추어 두 이론의 장점을 모아 조화를 추구하는 차원의 답변을 내놓은 정약용의

입장은 상당히 파격적이었으며 이는 정조가 그리는 진보주의 정신에 부합하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코드가 맞는 인물이었던 정약용은 정조의 교육방향에 가장 잘 들어맞는 인재였다.

며칠 후 정조는 대신들과의 경연석상에서 정약용의 답안을 극찬하며 정약용에게 규장각에서 찍은 책을 하사했다.

 

이때 정조의 나이는 33세, 정약용의 나이는 23세. 10년 터울의 두 사람은 강렬한 첫 만남을 가졌고 이때부터 탕평책을 힘겹게 이끌어 오던

정조에게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 된 정약용은 정조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며 정조 재위 기간 후반 많은 일을 함께 해 나가게 된다.

[뉴스엔 조은영 기자]

 

 

 

 

                                                   정약용 [丁若鏞]

 

 

1762(영조 38)∼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 經世遺表·牧民心書

·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762년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의 마재(馬峴)에서 태어난 후 부친 정재원(丁載遠)에게서 학업하였다.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 해남 윤씨와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니 약용은 넷째 아들이다.

 

어릴 적에 천연두에 걸렸으나, 왕족 출신의 명의 이헌길의 진료로 살았다.

정약용은 훗날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하고, 이것은 현대 의학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조선의 생명들을 구한다.

 

1776년에 풍산 홍씨와 혼인하였다.

누님의 남편으로 여섯 살 위인 이승훈, 큰형의 처남이며 여덟 살 위인 이벽과 친하게 지내면서 학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을 만났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으며, 성호 이익(李瀷, 1629~1690)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에게서 성호의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 사상의 토대를 다졌다.

 

1783년에 생원이 되고 1789년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 승정원의 가주서, 예문관검열, 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94년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암행하고 이듬해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자 천주교 신봉에 대한 소명 상소를

올리고 사퇴해야 했다.

 

그해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이어 병조참지, 좌부승지, 곡산부사 등을 지냈다.

1799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으로 사퇴하였다.

 

천주교 박해 연루

1800년 천주교에 대해서 온건한 정책을 펴던 정조 임금이 승하하자,

이듬해 정월 조선 천주교회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천주교 탄압령을 시작으로 신유박해라는 대박해를 받게 된다.

 

이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노론의 정치적 공격으로, 이 박해에 정약용과 그의 두 형인 정약전(둘째 형),

정약종(셋째 형)도 연루되었다.

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 노론에서는 이미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약종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무관심한 비신자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처형되었다.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의 이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 대부분이 이루어졌다.

1818년 8월에 귀양이 풀려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1836년 2월 22일에 자택에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