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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비운의 권력자 홍국영의 죽음, 실제 역사에선...

이미피더 2009. 4. 21. 19:11

 

 

 

 


MBC 월화사극 ''이산''에서 비운의 권력자 홍국영(한상진)이 죽음을 맞았다.


신하이기 이전에 홍국영은 자신의 벗이기도 했다며 유배를 보낸 홍국영을 여전히 그리워하던 정조 이산(이서진)은 홍국영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그가 유배지에서 변을 당할까 염려했다.

 

이후 홍국영이 위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조는 대역 죄인을 주상이 직접 찾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홍국영에게 직접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유배지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


죽어가는 홍국영의 손을 잡고 “이렇게 내버려둬서 미안하다.

이렇게 늦게 찾아온 것을 용서해라.

사실은 단 한번도 마음에서 내친 적이 없다”며 안타까워한다.

 

홍국영 역시 “소신을 찾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소신을 위해 아파하지 말라.

전하를 모신 그 충심만큼은 진심이었음을 믿어 달라. 전하와 함께 했던 모든 기억을, 전하께서 받았던 그 모든 것들을

잊지 않겠다”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망한 홍국영의 장지까지 숙위소 군관들에게 호의를 맡긴 정조는 이미 오래전 홍국영을 용서했음을 알렸다면 이리 허망하게

홍국영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며 더 빨리 홍국영을 찾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한다.

 

이분법적 선악구도가 명확한 월화사극 ''이산'' 안에서 거침없는 언변으로 개인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정조의 현실적

한계를 보완해주는 든든한 브레인 역할을 자처했던 홍국영은 중전 효의왕후(박은혜) 암살시도란 대역죄를 범했음에도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정조가 지킴으로서 여한없는 죽음을 맡았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이와 정반대다.

정조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홍국영이 자신의 탕평정치에 걸림돌이 되고 효의왕후까지 핍박하며 왕위계승문제에

적극 개입한 것에 대해 거듭되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정조는 홍국영과 처음 만난 그 날짜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홍국영에게 스스로 은퇴 상소를 올리도록 명한다.

32세의 젊은 나이의 홍국영은 정조의 뜻에 따라 정계 은퇴 상소를 올리고 정조는 즉석에서 이 상소를 받아들인 후 은퇴한 정계

원로에게 주는 봉조하의 직함을 홍국영에게 내렸다.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의 장례절차가 끝나기도 전 홍국영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한 정조는 숙위소도 없애 버리고 홍국영의

백부인 홍락순까지 정계에서 추방하고 홍국영의 모든 재산을 몰수한 후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처벌을 내렸다.


특히 산림 송덕상과 김종후 등 홍국영의 은퇴 결정을 말려야 한다는 노론계 의리를 대변했던 이들은 후에 국왕에 대한 의리

문제가 어두웠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제거됐으며 홍국영의 은퇴에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한 이들도 정국에서 배제됐다.

 

대신 홍국영을 엄격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청을 올렸던 이들은 정조의 신임을 받아 모두 중책에 올랐다.

홍국영을 지지했던 세력들을 모두 추방시켜버린 정조는 이후 오랜 시간 구상해 온 자신의 개혁정책을 하나씩 펼치기 시작했다.


월화사극 ‘이산’에서처럼 특권적인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도덕성마저 파탄이 난 홍국영에 대한 정조의 절절한 그리움이나

예우는 실제 역사에선 없었다.

 

오히려 정조가 냉정하리만큼 그의 세력을 제거해 버린 것으로 인해 일각에선 정조와 외척 관계로 연계됐고 원래 당파와도

상관없이 왕의 정적들을 처단하는 등 무소신의 모습을 보여줬던 홍국영이 노론벽파 세력을 완화 분열시키고자한 정조에게

이용당한 측면이 있다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그렇게 정조에게 버림받고 정계를 은퇴한 후 강릉에 거처를 정한 홍국영은 드라마에서와 달리 매일 술을 마시며 산에 뛰어

올라 바다를 보고 통곡하다 아무도 찾아주는 사람 없이 몇 달 만에 울화병으로 인해 33세의 젊은 나이로 쓸쓸하게 최후를 맞았다.

[출처 - 뉴스엔 조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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