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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동안 바깥구경 단 세번, 이사할 때만....[2005-09-30 12:04]

이미피더 2009. 1. 14. 16:57

 

 

                                " 30년 동안 바깥구경 단 세번, 이사할 때만..."

 

 

나는 태어난 지 백일도 안돼 우두(천연두) 예방주사의 발열후유증으로 중증 뇌성마비장애인이 됐다.

가족 중 반수가 병자라 물리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한 채 장애를 운명처럼 여기며 ‘방문지기’로 살아 온지 30년.

장애인이 있다는 것을 숨기는 것은 우리 가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30년 동안 바깥구경은 단 세 번뿐. 그것도 이사할 때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96년 9월, 어머니와 살던 서울 옥수동 산동네 월세집을 떠나 당시 작은 형님네 댁이었던 부천에 정착했다.

빚더미에 살던 집도 빼앗기고 형님네는 셋집에서 어머님네와 형님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맞벌이를 하고 계셨다.

나는 형수님을 대신해 초등학교 2학년과 유치원에 다니는 두 조카의 뒷바라지를 했다.


당시 나의 하루 일과는 방과 마루, 주방을 기어 다니며 청소로부터 시작해, 싱크대 앞 의자에 올라앉아 쌀을 씻어 밥과 반찬을

만들어 어린 조카들의 도시락과 준비물을 챙겨주는 등 살림을 도맡았다.


그리고 밤이면 혼신의 힘을 다해 휘청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3층 아파트 계단에서 1층까지 오르내렸다.

당시 내게 가장 두려웠던 것은 밤의 어두움도, 아찔한 1층 계단 밑도 아니었다. 그 두려움은 외부인과의 만남이었다.

30여 년간의 갇힌 생활…, 그것은 삼십대의 나를 어머니 품안의 어린 아이로 정체시켜 버린 것이다.

 

1988년, 나는 막내가 염려돼 부천까지 오신 어머니와 큰 형님께 중고품 휠체어를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며칠 후 다리가 불편하신 큰 형님께서 어렵게 구해준 중고 휠체어 덕에 드디어 사회로 첫 걸음을 내 디딜 수 있었다.


내 첫 번째 다리가 된 3만원짜리 휠체어. 팔과 손에 힘을 기르고 비장애인들과의 사교에 길을 닦느라 무척이나 혹사를 당해야 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놀림감도 많이 되었지만 사랑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하자 아이들은 나를 삼촌처럼 따뜻하게 받아들였다.


조카들이 커가고 작은 형님의 생활이 안정돼 갈 때 나는 자립의 길을 찾아 나섰다.

더 늦기 전에 한 사람만이라도 작은 형님의 짐을 덜어들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당시 작은 형님네는 지병인 뇌경색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칠순이 넘으신 어머님과 6.25때 피난 가다 넘어져 엉덩이뼈 탈골로

장애자가 된 미혼의 큰형님 생활비까지 떠맡고 있었다.

 

 

 

 

"중증 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러나 나이가 서른이 넘고 휠체어를 타며 손도 자유롭지 못한 중증장애인이 몸담고 일할 단체나, 시설, 공방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가 99년 초, 추위에 휠체어 링을 돌리는 손가락이 얼어 터지고, 때론 삼복더위에 숨이 막히고 정신이 흐려졌다.

그러나 자립을 해야 한다는 나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이 인천가톨릭 남성 장애인 단체의 소개로 ‘노틀담 장애인 교육원’을 입교했고 ‘귀금속가공2급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러나 그것도 3년뿐. 나는 또 다시 가 있을만한 시설을 찾아 국립재활원, 뇌성마비복지관, 장애인고용촉진공단, 남부장애인

복지관 등을 홀로 휠체어와 전철로 엉덩이가 헐도록 다녀야 했다. 그러나 이조차도 모두 헛수고였다.


다행이 천신만고 끝에 지금 살고 있는 부천 내 한 임대 아파트에 어머니와 큰형님과 함께 살수 있는 보금자리를 얻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생활비가 문제였다.

그동안 생활비를 대 주던 작은 형님네가 또 사업에 실패해 시골로 뿔뿔이 헤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생활비는 동사무소에서 나오는 생계비로 충당해야했다.

그러나 큰형님은 사정상 주민등록을 나와 함께 할 수 없기에 식구는 셋인데 생계비는 두 사람 몫이니 참으로 어려웠다.

또 어머니는 뇌경색 후유증으로 인한 안면근육 이상발작증세가 있어 청심환을 달고 사셨다.


나는 다행히 주위의 도움으로 94년 부천에서 ‘버스매표소’를 운영하게 됐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 가진 못했다.

중증뇌성마비장애인 내겐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매달려야 하는 매표소 운영은 무리였다.

불혹에 이른 뇌성장애인인 내 몸은 좁은 공간에서 굽은 자세로 하루 16시간 시달리며 서서히 경추를 무너트리고 있었다.


그나마 제일 자유롭던 왼손은 목과 어깨의 끊어질 듯한 통증에 계산대 위로 올릴 수도 없었다.

무릎으로 길수도 없었고, 마지막엔 앉아있는 중심마저 빼앗겼다. 계산대를 잡고 있다가 문밖으로 나동그라지기를 수십 번.

나는 우리의 생의 터전이며 내 생명처럼 여기던 매표소를 평소 친동생같이 여기던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매표소를 운영하며 얻은 경추 디스크를 고쳐보겠다고 병원에 입원도 했지만 “뇌성마비 환자라서 수술은 안 된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또 “3개월 밖에 못 산다”는 암담한 말을 듣고 퇴원해야 했다.


장애인들에 대한 의식... 생각만 있을뿐 가슴으론 느끼지 않아


집에 돌아와 병원에서 생각했던 글들을 테이프에 녹음시켰다.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내 글들은 <꼬맹이의 열망>이란 제목의 책으로도 발간됐다.


나는 요즘 ‘부천시중증장애인자립생활센터[준]’ 의장으로 완전한 자립센터를 준비 중이다.

하지만 장애인 단체장으로 뛰며, 이 사회가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과 시설을 조사해보니, 우리 시대 때 보다는 인식과 시설이

무척 좋아졌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 인식과 시설이 너무도 의례적이며 형식적임 또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장애인들의 이동 편의 시설인 리프트의 문제나 장애인 화장실이 있지만 정작 장애인들이 편히 이용할 수 있도록 규격에 맞춘

화장실은 백화점, 관공서, 공연장, 공원 그리고 장애인에게 가장 중요한 병원까지도… 한곳도 없었다.


나는 이런 것을 보고 들으며 아직도 우리나라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에 대한 의식이 생각만 있을 뿐, 진정 가슴으론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활동을 계속할수록 ‘그럼 다른 나라는 과연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난 5월 인천과 경기지역에서 일본 장애인 시설 연수를 떠났다.

당시 나는 ‘센터장으로 외국의 장애인 시설과 실태를 보아야 한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수급자인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단돈 1000원이 아쉬울 때가 있는 내가 무슨 꿈같은 생각이냐’고 내 자신을

채찍질하며 마음을 접었다. 그러나 아직도 기회만 있으면 외국의 장애인 실태 파악을 꼭 해보고 싶다.


나는 우리나라도 이젠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장애인들 스스로의 생활을 관리하며 독립 정신을 길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하나 되는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