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야기들/이런저런 뉴스

1%에 운 불사조.. 인제 가면 언제 오나, 한끝차 '계룡대첩'

이미피더 2016. 4. 15. 14:27


“거의 맨몸이나 다름없는 한 사내가 장막 사이로, 얼음과 사막의 영역 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정돈되지 않은 무리를 이끌며 홀로 걸음을 옮겨 나아갔다.

다른 곳에서 도래한 목소리는 또 다른 소리로 우리네 귓가에 생경하게 울려 퍼졌다. …

아주 오래된 세계가 우리의 머릿속을 맴돌았고, 모든 것이 추락할 순간이 고대 되었다.”


르베르디가 읊조린 한 사내의 이야기는 흡사 7선 고지를 눈앞에 두고 추락한 이인제 후보를 떠올리게 한다.

가난한 집안환경을 딛고 판사 출신 변호사를 거쳐 정계 입문 후 2번의 대권 도전 실패와 6선 의원 생활에 이르기까지

그 걸음엔 무려 13번의 당적 변경과 10번의 선거가 있었으나, 피닉제(피닉스+이인제)란 별명이 아깝지 않을 만큼

소속정당이 어디든 대선을 제외한 지선과 총선에서 당선가도만을 달려온 진정한 불사조였다.

그런 그의 비상이 이번 20대 총선에서 좌초됐다. 충남 논산시계룡시금산군에 출마한 이 후보는 44,165표를 얻어 더불어민주당의 김종민 후보와 1,038표(1%) 차로 석패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식 당시 이인제 후보(가운데),


철새라는 비난에서 불사조라는 중의적 경탄을 지나 고향에서의 낙선으로 사실상 정치인생의 종반부를 준비하는 그의 행보를

연어에 빗대기엔 너무 이른 것일까.

그의 선거 이력을 놓고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 정치사에 등장한 여야 정당의 색깔이 지나치게 모호해 오고감에 있어 큰 위화감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혹은 한 명이라도 더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정당의 정치적 이기심의 발로는 아니었는지,

도 아니라면 능력이 출중한 정치인이 대권이라는 목표달성을 위해 종횡무진 하는 행태를 국민과 정당 모두가 묵인했던 것은

아닌지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공교롭게도 이번 20대 총선에서 당적을 바꿔 출마한 서울 용산구 진영 후보와 부산 사하구 갑 조경태 후보는 각각 지역구에서

당선의 기쁨을 누렸다.


소작농의 아들

월사금이 없어 초등학교에 1년 늦게 입학했던 소작농의 아들은 우수한 성적 하나만으로 경복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다. 전태일 분신사건과 3선 개헌 반대로 촉발된 시위를 통해 격렬한 학생운동의 길에 들어섰고 졸업 후 유신반대 민주화 운동에 투신, 군에 강제 징집된 뒤 늦깎이로 사법고시를 패스한 판사는 3년 뒤 변호사가 되어 산업재해, 부당해고사건 등을 도맡아

변호하는 노동인권 전문가로 변모했다.


                                                 5공 청문회에서 이희성 5.18 당시 계엄사령관에게 질의하는 이인제 후보,

                                                                  사진 = MBC '뉴스데스크' 캡쳐


전략공천에서 청문회 스타로


고교선배 김덕룡 전 의원의 소개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이 후보는 그가 이끌고 있던 민족문제연구소 이사로 영입되며 정치에 첫발을 디딘 후 이듬해 전략공천으로 차출, 경기 안양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13대 국회의원으로 여의도에 입성했다.

그해 열린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일명 5공 청문회)에서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 장군을 향해 광주시민에 대한 계엄군의 집단 발포 사실을 날카롭게 추궁하며 주목을 받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언도한 80년 군사재판의 국가보안법 항목은 군법회의의 관할권이 없다는 사실을 밝혀내 일약 ‘청문회 스타’로 떠오르며 전국구 정치인으로 발돋움한다.


                                                             15대 대선 출마 당시 이인제 후보의 선거홍보 포스터


내각 최연소 장관에서 대선 후보까지


이후 3당 합당에 YS를 따라 민자당으로 당적을 바꾼 이인제 후보는 14대 총선 재선 후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노동부 장관에 발탁, 내각 최연소 장관으로 이름을 올린다. 과거 노동인권 변호사로 활약했던 경험을 십분 활용, 현장을 누비며 다양한 활동을 펼친 그는 장관 재임 당시 고용보험제도를 최초로 도입하고, 현대차 노조문제를 놓고 직접 중재에 나섰는가 하면 당시 인기 드라마였던 ‘TV 손자병법’에 노사문제 중재자로 출연, 현직 장관으로는 처음으로 드라마에 출연하는 파격 행보를 이어갔다.


이런 대중적 인기를 등에 업고 경기도 도지사 선거에 출마, 여유 있게 당선되며 대권잠룡으로 떠오른 그는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내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밀려 2위를 기록했으나 경선결과 불복을 선언하며 신한국당을 탈당, 국민신당 후보로 독자 출마해 3위에 그친다.

이때부터 그에게 쏟아진 철새정치인이라는 비난은 험난한 당적변경사와 맞물려 지금까지도 그의 발목을 붙잡고 흔든 원죄로

남았다. ‘작은 거인’의 이미지가 퇴색했음은 물론이고, 이후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5공 청문회로 함께 주목받았던 노무현 후보의 ‘노풍’에 휩싸여 출마가 좌절되면서부터는 본격적인 당적의 방황이 시작됐다.



선거 불패 신화로 '피닉제'라 불린 이인제 후보는 이번 20대 총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사진 = 아시아경제 DB


당적변경의 씁쓸한 기록


통일민주당,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국민신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국민중심당, 새천년민주당, 민주당, 무소속, 자유선진당, 새누리당에 이르기까지. 이인제 후보가 거쳐 온 정당의 이름만 훑어도 80년대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대한민국 정당사의 뿌리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정치의 파쇄성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는 자신의 이 같은 잦은 당적변경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매번의 결정은 한국 정치의 큰 흐름을 탄 것”이라 밝힌 바 있는데,

18대 총선에선 무소속으로, 19대 총선에선 자유선진당으로 금배지를 단 그는 지난 2013년 15년 만에 친정인 새누리당에 소속정당인 선진통일당(자유선진당)과의 합당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으로 출마, 아깝게 고배를 마셨다.


선거판엔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

선거의 여왕이라 불렸던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총선을 앞두고 공천에서부터 유세까지 직간접적 암약을 통해 또 한 번 승리를 기약했으나 대대적 역풍을 맞았다. 이인제 후보 역시 대선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진 적 없는 불패의 아이콘이었으나 이번 총선에서 근소한 표차로 패배했다.


한 세대의 영광이 퇴색하고 맞는 좌절의 아픔은 쓰라리다.

과반의석 확보가 여유 있을 것이라는 당초 전망과는 달리 새누리당은 122석을 얻는 데 그쳐 123석을 확보한 더불어민주당과

38석을 달성한 국민의당에 밀려 16년 만에 여소야대 정국을 맞았다.


14일 오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20대 총선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 의사를 표명했고, 청와대 또한 대변인을 통해 “20대 국회가 민생을 챙기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새로운 국회가 되길 바랍니다. 국민들의 이런 요구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라고 짧은 입장만을 밝혔을 뿐이다.

기라성 같은 정치 거물들이 명멸해온 여의도에 20대 총선으로 새롭게 떠오른 정치 신인들을 향한 스포트라이트가 유난히도 반짝이는 오늘, 저물어가는 거물의 뒷모습에서 그 역시 정치에 입문했던 초심이 저러했을까 그 원형질을 꺼내어 살펴본다.

새로운 것은 없다. 그리고 영원한 승자도 없다. 톨스토이는 인생을 나그네의 여정에 비유했다. 이인제 후보는 13일 밤, 개표결과를 확인한 뒤 담담히 소감을 게재했다. 겸허한 문장에 한 시대가 가고 있음을 느낀다.

“주민의 뜻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고장과 나라를 위해 변함없는 열정으로 일하겠습니다. 수고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