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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과거청산, 왕권강화 새시대를 향한 첫걸음 ..... [2008/02/29]

이미피더 2009. 3. 25. 01:16

 

 

 

MBC 월화사극 '이산'의 정조(이서진)가 새 시대를 향한 첫 걸음을 내딛었다.

치열한 당쟁의 시대, 정치적 포용력과 군왕으로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연 개혁가 정조의 첫 걸음은

역시 과거 청산과 왕권 강화를 위한 로드맵을 구상. 정조는 이를 통해 할아버지 영조(이순재)와 아버지 사도세자(이창훈)가

그토록 염원했던 성군의 길을 걷기 위한 초석을 틔웠다.

 

 

#. 과거청산

 

정조 이산은 세손시절부터 혼란스러운 정치권력의 중심에 놓여있었다.

특히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는 정조 개인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지만 이는 정조 즉위의

정당성 문제와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비록 정조가 큰 아버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돼 있었다 해도 친아버지 사도세자의 신원이 회복되지 않는 한 죄인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조에게 개인적인 상처를 덜어내고 왕위 계승의 정당성과 명분을 바로 세우며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한 과거청산 작업은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첫 걸음이 될 수밖에 없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조정대신들 앞에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공표하고 이미 지난날 모든 억울한 누명을 벗은 사도세자를

부인하고 능멸하는 자들은 대역죄로 다스리겠다고 선포한 것도 그 때문이다.

 

또 살수(이정용)와 자객 20여명을 궁궐에 잠입시켜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양위 받고 즉위식을 마친 임금을 암살하려 했던 정후겸을

비롯한 노론 일파에게 흔들림 없는 추국과 단죄를 직접 행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정조는 과거청산 작업을 통해 집권초기 혼란을 서둘러 수습하고 권력과 세도를 잡기 위한 치열한 현실 정치에 발을 들이는

한편 위민을 위한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할 초석을 마련코자 한다.

 

 

#. 왕권강화

 

정조는 자신을 반대하는 벽파에게 수적으로나 영향력 면에서도 뒤떨어지는 환경 속에 즉위했다.

즉위 초 자파의 국왕이 아니라는 이유로 왕을 시해하려는 암살단이 궁내에 난입하는 등 성공하지 못한 모반만 수차례다.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반대파에 대한 공포는 정치 체제를 혁명적으로 개혁하지 않는 한 조선의 미래는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하고 친왕세력의 양성과 함께 스스로 정치의 전면에 나선 특별한 군주가 되도록 했다.

 

공론정치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 정치체계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개방된 사회로의 확장을 통해 새로운 개혁 세력을 창출해

내려 했던 정조의 정치가적 면모는 이같은 배경에서 비롯됐다.

 

26일 방송분에서 왕권 강화를 위한 로드맵을 구상한 정조가 규장각 건설을 서두르고 익사위 중심인물들의 품계를 박하게

올린 것도 그 때문이다.

 

정조가 역대 국왕의 어제·어필을 보관하는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조선 왕조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만백성에게 보여 왕에 대한

충성심을 관리하고 당시 왕권을 위태롭게 하던 척리(戚里)·환관(宦官) 들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는 한편 건국 이래의 정치·경제·사회

등의 현실문제의 해결은 곧 학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우문정치를 실행할 우수한 관리들을 길어내기 위함이다.

 

즉 국가적 규모로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 간행하는 규장각 설치는 왕권 강화를 위한 행보인 것이다.

이와 함께 아직 드라마에선 등장하지 않았지만 숙위소와 장용영이란 왕의 친위부대를 만든 것 역시 왕권강화를 위한 로드맵 중

하나였다.

 

당시 군권은 노론세력이 차지하고 있었고 이들이 군대를 동원하면 왕권 무력화, 심지어 왕을 폐위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에

정조는 장용영이라는 친위부대를 만들어 노론세력을 견제하고 아울러 왕의 권위를 높이려고 했던 것이다.

<뉴스엔 - 조은영 helloey@newsen.com>

 

 

 

 

장용영 [壯勇營]

 

조선 후기 1793년(정조 17)에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군영(軍營).

정조는 새로운 금위체제를 위해 1785년에 장용위(壯勇衛)라는 국왕 호위의 전담부대를 창설하였다.

 

장용위의 총책은 장용영병방(壯勇營兵房)이라 했고, 그 아래에 무과 출신의 정예 금군을 두어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체제로 만들었다.

 

그 뒤 1793년에 그 규모를 더욱 확대시켜 하나의 군영으로 발전시키니, 이것이 곧 장용영이다.

장용영은 크게 내영과 외영으로 나누어졌다. 내영은 도성을 중심으로,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내영은 1월에 수원을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장용외사(壯勇外使)의 직을 겸하도록 함에 따라 자연히 도성의 본영을 내영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내영의 지휘관인 장용영병방은 장용사(壯勇使) 또는 장용영 대장으로 개칭되었다.

 

그 규모는 종래의 마보군(馬步軍) 3초(哨)에서 5사(司) 25초로 확대되어 도제조아문이 되었다.

그 아래에 군색(軍色)·향색제조(餉色提調) 각 1인, 장용사 1인, 종사관 1인, 선기별장(善騎別將) 2인, 행파총(行把摠) 5인,

선기장(善騎將) 3인, 초관(哨官) 25인을 두었다. 5사는 전·후·좌·우·중사로 도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 일대를 포함하였다.

 

외영제는 수원부를 화성으로 개칭하고 정3품의 부사에서 정2품의 유수로 승격, 장용외사와 행궁정리부(行宮整理府)의 직을 겸하게

했으며 그 아래에 판관 1인을 두었다.

 

이는 곧 정조가 자신의 생부인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현륭원(顯隆園)을 중시해 취했던 것이다.

입방군은 비교적 정예군사로서 1년에 10초씩 5번(番)으로 나누어 1번에 2초씩 입방하게 하였다.

 

이에 비해 협수군은 유병장(遊兵將)인 과천현감을 중심으로 유사시에 동·서·남·북성을 각각 분담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입방군·협수군 외에 화성 별개의 수성군(守城軍)이 구성되어 있었다.

 

외영의 편제는 다시 1798년에 크게 개혁되어 오위법(五衛法)으로 변했다.

이는 장악위(長樂衛) 아래에 오위를 두고 각 위를 중심으로 한 정병과 각 대를 중심으로 한 성정(城丁)으로 편성했던 것이다.

 

정군은 병조의 상번기병(上番騎兵)이, 성정군은 인근 각 읍의 납포군(納布軍)이 주축이 되었다.

이와 같이 장용영은 그 설치 목적이 왕권 강화에 있었기에 편제도 중앙집권적인 오위체제를 도입, 강력한 왕권의 상징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자 1802년(순조 2)에 혁파되고 말았다.

 

 

 

숙위소 [宿衛所]

 

조선시대 왕을 호위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관청. 1777년(정조 1) 11월 대전(大殿)을 숙위하는 금군(禁軍)의 신변숙위 실수를

염려하여 건양문(建陽門) 동쪽에 별도로 설치한 왕의 호위소이다.

 

당시 세도가였던 홍국영(洪國榮)이 숙위대장으로 제수되어 금군의 숙위를 통솔하였다.

숙위대장은 궐내 각처의 위장(衛將)·부장(部將)·금군·도감군병(都監軍兵), 각 문의 수문장(守門將), 각 국(局)의 별장으로 하여금

매일 궐 내외와 3영(三營: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입직(入直)·순라(巡邏)의 유무상황과 군병의 교체를 보고하도록 통솔하였다.

 

또 위장·부장·내삼청금군, 금호문(金虎門)·홍화문(弘化門)·건양문의 장병, 각 국의 별장, 각 관청의 군병에 이르기까지 8일마다

교대할 때에는 숙위소에 그 내용을 정단(呈單 : 서면을 관청에 제출함.)하도록 하였으며, 숙위소로부터 숙위할 궁을 정해 보낸

뒤에야 이를 행하도록 하였다.

 

한편, 병조에서도 순검(巡檢)에 관한 모든 일을 숙위소를 통하여 거행하게 하였으므로 무릇 모든 문서는 숙위대장을 거치게 되는

폐단이 나타났다. 1780년 홍국영이 대역죄로 폐출된 이후 숙위소도 또한 혁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