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만리장성 (제작시기: BC 4-AD 7세기)
특징: 만리장성은 중국 역대 왕조들이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세운 방어용 성벽.
지도상 연장 길이 2,700km이며, 중간에 갈라져 나온 지선들까지 합치면 총 길이가 약 5,000~6000km로 우주에서 식별
가능한 유일한 인공 구조물.
만리장성은 중국 역대 왕조가 변경을 방위하기 위해 축조한 대성벽으로써 보하이 만(渤海灣)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이나, 실제는 약 6,400㎞(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 유적이다.
춘추시대 제(齊)가 영토방위를 위햐여 국경에 쌓은 것이 장성의 기원이며 전국시대의 여러나라도 이에 따랐다.
진(秦) 시황제(始皇帝)는 중국 통일(BC 221) 후 흉노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간쑤성(甘肅省) 남부로부터 북으로, 황하강
(黃河江)의 대굴곡부(大屈曲部)의 북쪽을 따라 동으로 뻗어나가, 둥베이(東北) 지구의 랴오허강(遼河) 하류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는데, 절반 이상은 전국시대의 연(燕)·조(趙) 등이 쌓은 장성을 이용한 것이었다.
근년에 이 장성의 동부 유지(遺址)가 둥베이지구에서 발견되고 있다.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흉노로부터 지키려고 장성을 란저우(蘭州) 북방에서 서쪽으로 둔황(敦煌)
서편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연장하였다.
남북조시대에는 북방민족의 활동으로 장성 위치는 남하하여, 6세기 중엽 북제(北齊)는 다퉁(大同) 북서에서 쥐융관(居庸關)을
거쳐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는 장성을 축성하였다.
수(隋)는 돌궐·거란 방비를 위하여 오르도스(내몽골자치구의 중남부) 남쪽에 장성을 쌓았다.
당대(唐代)에 들어서 북쪽까지 판도를 넓혔기 때문에 방어선으로서의 장성이 필요하지 않았고, 오대(五代) 이후에는 장성지대가
북방민족의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방치되었다.
장성이 현재의 규모로 된 것은 명(明)나라시대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관광 대상이 되고 있는 바다링〔八達嶺〕 근처의 장성은 높이 8.5m, 두께는 밑부분 6.5m, 윗부분 5.7m이며, 위에는
높이 1.7m의 연속된 철자형(凸字形) 담인 성가퀴(城堞)를 만들고 총안(銃眼)을 냈고, 120m 간격으로 돈대(墩臺)를 만들어
군사의주둔과 감시에 이용하였다.
청대(淸代) 이후에는 군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본토와 만주·몽골 지역을 나누는 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되었다.
▲멕시코 치첸 이차의 마야 유적지 (제작시기: 800년 이전)
멕시코 유카탄반도 - 마야문명 중심지 치첸 이트시의 유적 가운데 하나로 정상에 신전이 위치함
세노테와 길로 길게 연결된 도시의 성역은 ‘카스티요’와 ‘전사의 신전’이라는 거대한 종교적 건물 두 동이 차지하고 있다.
쿠쿨칸신을 모셨던 듯한 카스티요는 정사각형 기단에 30m 높이의 피라미드이다.
춘분과 추분의 해 질 무렵 이 피라미드의 가장자리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계단을 따라 굽이쳐 내려가며 마치 거대한 뱀이 기어
가는 듯한 광경을 연출한다.
이 건축물 안에는 앞 시기에 세운 우아하고 작은 피라미드가 있는데 카스티요와 같이 탈루드-타블레로 건축으로 9층 구조이다.
카스티요의 4면에는 웅장한 계단이 꼭대기 성소까지 이어져 있는데 각기 91개의 층계로 이루어져 기단부의 층계를 포함한 총
층계 수는 태양력의 날짜와 꼭 같은 365개이다.
툴라의 가장 중요한 건축술을 보여주는 전사의 신전은 새벽별인 금성의 속성을 가진 쿠쿨칸신에게 바쳐졌다.
육중한 4단 피라미드에서 착몰상이 자리한 꼭대기 층의 성소까지 긴 계단으로 올라간다. 신전 옆의 ‘기둥 천 개의 회랑’은 한때
신전과 접해 있던 장대한 다주식 회랑의 잔해이다.
10세기말부터 유카탄 지역에서 지배 역할을 담당했던 치첸 이차는 1200년경부터 쇠퇴하여 마야판이 톨테카 인의 수도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으나 신성한 샘 세노테는 스페인 정복 시대에도 여전히 순례지로 존속했다.
▲페루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 (제작시기: 1460-1470년)
페루 쿠스코 : 해발 2,430m에 세워진 잉카제국의 마지막 도시로 잉카 멸망 후 잊혀진 뒤 1911년에 발견됨
페루 잉카제국의 비밀 공중도시 -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속 절벽에 위치한 공중도시 마추픽추는 우르밤바 계곡지대
해발 2280m 고지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 "나이든 봉우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비밀스럽게 고지대에 숨겨져 있어 "공중 도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설에 의하면 잉카인들은 외부의 침입을 피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도 하며, 홍수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고지대에 둥지를
틀었다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어떠한 설도 이 거대 수수께끼의 비밀을 풀지는 못한다.
마추 픽추(machu picchu)는 페루에 있는 잉카 문명의 고대 도시이다.
페루 우루밤바(Urubamba) 계곡에 연한 높은 산의 산턱(해발 약 2,057 m)에 위치하여, 산자락에서는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종종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공중의 누각'으로 불린다.
그 유적은 3 m씩 오르는 계단식 밭이 40단이 있어서, 3,000개의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유적의 면적은 약 13 k㎡로, 돌로 지어진 건물의 총 갯수는 약 200호 정도 된다.
마추 픽추에는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가 아직 많고, 열대 산악림대의 중앙에 위치하여 식물의 다양성이 풍부하다.
행정상으로는 쿠스코와 같은 지역에 속해 있다.
현재 페루에는 10개소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있는데, 마추 픽추는 그 중 최초로 쿠스코와 동시(1983년)에 지정되었다
1932년에 제작된 건축물은 80여년간 리우데자네이루의 상징이 되었다.
브라질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세운 리우 데 자네이루의 그리스도 상.
해발 700미터가 넘는 코르코바두산 꼭대기에 세워져 있다.
길이 28미터로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예수상이다.
원래 하나로 조각한듯 보이지만 머리, 팔, 다리 등 신체 각부분들을 따로 따로 조각하여 결합한 것이라 한다.
아랫부분에는 2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도실(사제가 상주하면서 사목하는 곳은 아니므로 성당이라 할 수는 없다)이 있다.
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지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Colosseo)라고 한다.
콜로세움은 기원후 72년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시대의 이완된 국가 질서를 회복한 후, 네로의 황금궁전의 일부인
인공호수을 만들었던 자리에 착공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80년) 때 완공하였다.
완성 축하를 위해 100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며, 그 때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한다.
장대한 타원형 플랜이 있는 투기장은 아치와 볼트를 구사한 로마 건축기술의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조물로서 거대한 바위
축대위에 축조되었으며, 이 축대는 점토질의 인공호수위에 설치되어 지진이나 기타 천재로 인한 흔들림을 흡수하 도록 설계
되었다.
약 5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제국 최대의 투기장이었다.콜로세움은 최대 지름188 m, 최소 지름 156 m,
둘레 527 m, 높이 57 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인데, 1층은 토스카나 식, 2층은 이오니아 식, 3층은 코린트 식의 둥근
기둥으로 각각의 아치가 장식되어 있다.
또한 4층을 제외하고 원기둥과 원기둥 사이에는 아치가 있고, 2층과 3층에는 조상(彫像)이 놓여 있다.
내부는 긴지름 86m, 짧은지름 54m의 아레나(투기장)를 중심으로 카베아(관객석)가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칸칸마다
나누어진 맹수들의 우리 위에 나무로 바닥을 만들어 지상과 지하를 분리시켰는데 지하의 방에는 맹수뿐만 아니라 검투사,
사형수들이 갇혀 있었다. 이 경기장은 지하의 대기실 및 천막 지붕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곳에서는 검투사의 경기, 맹수와의 싸움이 즐겨 행해졌으며, 심지어는 장내에 물을 채워 전투를 하는 모의 해전 등도 벌였다.
제정 초기 크리스트교 박해 시대에는 많은 신도가 이 콜롯세움에서 야수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다.
콜로세움은 완공된 이래 300여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사투가 계속 벌어지다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에
따라 마침내 처참한 역사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 후 콜로세움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입기도 하고, 중세 교회를 짓는데 재료로 쓰이기도 해 외벽의 절반이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다.그러다가 18세기 경 교황의 명에 따라 기독교 수난의 현장으로 복구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요르단 고대도시 페트라 (제작시기: BC 9-AD 40년)
아라비아사막 끝 나비테아 왕국의 산악도시로서 암석의 조각과 수로 등이 유명함.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시대에 걸쳐 아랍 왕국의 중심지였던 고대도시.
장미빛의 붉은도시 페트라 - 요르단에 위치한 붉은 사암을 깍아서 만든 건축물이다.
이것을 건축한 나바티아 족은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한 사암석지를 조각하여 현대의 모습을 완성 시켰다.
그것도 2000년전에 말이다.
외부세계에서 완전이 갇혀져 있는 이곳 페트라는 매년 수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으며, 나바티아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 도시의 유적은 요르단의 마안 주(무하파자)에 있다.
페트라는 동서방향으로 모세 계곡(Wadi Msa)이 관통하고 있는 해안단구 위에 건설된 도시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 계곡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바위를 칠 때 물이 용솟음쳤다는 곳 중의 하나이다.
모세 계곡은 연노란색으로 변해가는 빨간색과 보라색의 암맥을 가진 사암(砂岩)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때문에 페트라를 '빨간 장밋빛 도시'라고도 부른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인데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셀라가 이렇게 바뀐 것 같다.
이곳에 갈 때는 대개 동쪽에서 좁은 시크 계곡을 따라간다.
페트라에서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이후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아랍족의 하나인 나바테아인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자신들의 수도로 삼았던 BC 312년 이전에 도시가 어떠했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의 통치 밑에서 향료교역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106년 로마인들이 침입하여 나바테아인을 몰아낸 뒤에도 페트라는 로마 제국 치하의 아라비아 지방에 편입되어 계속 번영했으나
무역로가 바뀌자 상업이 점차 쇠퇴했다.
7세기에 이슬람 제국이 침입한 뒤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가 마침내 1812년에 스위스의 작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여행중에 발견되었다.
1958년부터 시작된 조사에서 영국고고학대학 예루살렘 분교와 미국동양학대학의 조사단은 로마 통치 이전의 페트라에 관해
많은 것을 알아냈다.
여러 바위 유적지 중의 하나인 앗데이르는 정면을 기둥으로 장식한 모습이 인상적이며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페트라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은 무덤인데, 많은 무덤이 정교한 겉모양을 가지고 있어 지금은 거주지로 쓰이고 있다.
위치: 인도 아그라 주요특징: 무굴제국 황제 샤자한이 왕비 마할의 죽음을 애도해 건립한 묘로서 마할의 왕관이란 뜻)
인도의 아그라에 위치한 타지마할은 지금까지 한번도 주인을 만나지 못하였다.
타지마할은 본디 인도의 쿠람왕자가 그의 아내 베굼공주를 기리기 위하여 건축한 기념비로서 배굼공주는 쿠람왕자의 아이를
출산하는 도중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런한 슬픈 배경을 가지고 있는 타지마할은 실로 역사상 가장 비싼 선물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타지마할의 신비로움은 바로 그 웅장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곡선과 원형의 모습 때문에 전혀 거대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하늘위에 떠있는 구름" 같다고 하였다.
세계 신 7개 불가사의 후보
노이슈반슈타인 성(Schloss Neuschwanstein)-독일 |
1869년 착공되어 1896년 완공되었는데, 이 성의 완공되기 전 갑작스런 루트비히 2세의 죽음으로 인해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었다. 지금까지도 많은 관광객들이 둘러 보는 성안의 16개의 방은 왕의 죽음전에 완성된 것이다.
동화같은 삶을 살기를 원했던 루트비히 2세의 화려한 성을 보기 위해 매년 수없이 많은 관광객들이 이 곳으로 몰려온다.
전설같은 신비로운 꿈과 숨을 멎게 하는 주변 경관 또한 사람들을 이 곳으로 이끄는 요소이다.
바그너[1813.5.22 ~ 1883.2.13]를 좋아한 루트비히 2세가 오페라 '로엔그린' 중 백조의 전설에서 모티브를 얻어 지은 성으로
중세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노이슈반슈타인 성(Schloss Neuschwanstein Castle - New Swan Castle)은 "새로운 반석위에 앉은 백조"라는 뜻으로,
"슈반가우"라는 작은 마을에 있다.
칠레 이스터섬 거석상
이스터섬의 상징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면석상의 수는 대략 550 개. 높이는 1 ~ 30 m. 대개는 해안을 따라 위치함.
지구상에서 가장 멀고 고립된 섬 이스터는 칠레에서 3700㎞나 떨어져 있다. 가장 인접한 섬인 타이티와도 4000㎞ 거리에 있다.
인간의 거주지로는 최고 외진 곳이다.
세모꼴 화산섬인 이스터섬의 길이는 동서 15㎞ 남북 10㎞. 거제도 면적의 3분의 1을 조금 넘는다.
제주도의 오름이나 경주의 왕릉을 연상시키는 봉우리들이 섬 여기저기에 솟아 있다.
섬의 맨 꼭대기 테라 바카산(해발 502m)에서 내려다보면 절대 고도에 와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스터섬은 1722년 4월 5일 부활절 저녁 네덜란드 군함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
이스터(Easter:부활절)란 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라파누이(큰 섬)' 혹은 '테피트오테헤누아(세계의 배꼽)'로 부른다. 이스터 섬은 칠레령이다.
고립무원의 외딴 섬에는 사람 얼굴 모양을 한 '모아이'라고 불리는 거대 석상들이 흩어져 있다.
이스터섬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된 것은 바로 이 정체불명의 거대 석상들 때문이다.
섬에는 모두 897개의 모아이가 있다.
이 가운데 라라쿠 채석장 주변으로 만들다 만 400개의 모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다.
완성된 모아이들은 대부분 해안선을 따라 바다를 등지고 세워져 있다.
2~3m의 작은 크기부터 10m를 훌쩍 넘기는 것까지 다양하다.
섬 주민은 4000여 명. 하지만 모아이를 보기 위해 한 해 4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섬을 찾아 든다.
관광객들이 섬에서 느끼는 단 하나의 감정은 경이감이다.
석상들 가운데 어느 것도 그 목적이나 의미가 밝혀지지 않았다.
원형 그대로의 신비를 간직한 채, 수백 년의 고고학적 탐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만족할만한 설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원주민들이 조상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나 기념물 정도로 추정될 뿐이다.
적회색 화산 응회암을 깎아 만든 18t의 거석 유적은 머리 위에 다른 돌을 깎아 만든 원추형 관이나 매듭이 올려져 있다.
관(冠) 무게만 6t에 달한다. 모아이는 500년 동안 대량으로 조각되다 1650년 무렵 '마지막 모아이(높이 4m)'를 끝으로 전면
중단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스터섬의 남서쪽 오롱고 부락에서는 매년 9월에 '새 인간' 대회가 열린다.
앞바다에 떠 있는 새들의 섬 '모토누이'에서 제비갈매기의 알을 찾아오는 경기다.
맨 먼저 되돌아오는 사람이 탕카투 마누(학식이 뛰어난 신성한 새 인간)로 선포돼 다음 대회 때까지 마을의 왕으로 존중받는다.
대회 주관자들과 롱고롱고 서판을 보관하는 마을 원로들에 의해 공식화된 이스터섬의 축제이지만 대회의 기원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고대부터 내려오던 영원불멸에 대한 추구 의식 정도로 학자들은 유추하고 있다.
이밖에 1958년 미국 핵잠수함 노틸러스호가 세계 일주를 할 때 승선했던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확인되고 있지 않던 매우 높은
수중 봉우리가 섬 주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힌 적이 있다.
이스터 섬의 또 다른 이름인 '세계의 배꼽'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스터섬과 한국과의 거리는 1만6000㎞. LA를 경유해 날짜변경선을 넘어 칠레의 산티아고까지 비행기만 22시간을 타야 한다.
산티아고에서 이스터섬의 마타베리 공항까지는 4시간이 걸린다.
미국 자유의 여신상
자유의 여신상(미국): 미국 뉴욕 항의 리버티 섬에 1884년 세워진 거대한 여신상. 무게 225 t. 횃불까지의 높이 약 46 m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 뉴욕 뿐만아니라 미국의 상징이 된 자유의 여신상입니다.
자유를 표현할 때 대명사가 되어버린 자유의 여신상 .관광지로 몇 점 짜리 일까요?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은 1886년 미국 독립 1백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에서 기증한 것이다.
미국과 프랑스의 우호증진을 위한 선물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전세계인들에게 미국의 상징 더 나아가서는 자유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은 리버티 아일랜드(Liberty Island)에 위치하고 있는데 리버티 아일랜드까지 가는 사우스 페리는 배터리 파크에서
탑승하면 되고 30~45분 정도 소요된다.
자유의 여신상의 무게는 225t, 대좌(받침대) 높이가 약 47.5m, 동상 자체의 발끝에서 횃불까지의 높이가 46m이다.
지면에서 횃불까지의 높이는 93.5m에 이른다. 그리고 손만해도 5m, 집게 손가락이 2.44m나 된다.
대좌(받침대)에서 정상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을 올라가야 하며 이 엘리베이터를 타기위해서는 보통 3시간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강심장을 가진 사람들은 왕관까지 2층을 더 올라 12층까지 갈수도 있다. 이곳에는 박물관 선물가게도 있다.
자유의 여신상에 관한 몇가지 사실
자유의 여신상은 1875년 프랑스에서 만들기 시작하여 1884년에 완성되었고 1885년 미국으로 건너가기까지 프랑스 파리에
서 있었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자유의 여신상을 분해하고 조립한 사람은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이었다
그리고 자유의 여신상이 디디고 있는 토대는 1877년 건축가 리차드 M.헌트가 디자인하여, 1883년 만들기 시작하였고 1884년
완성되어, 1886년부터 여신상을 받치고 있었다.
프랑스 파리 에펠탑
1889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장에 세워진 높은 철탑. 높이 약 300 m. 이 탑이 세워진 뒤 40 년간 최고 높이를 자랑했음.
호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이집트 피라미드
고대 이집트의 제3왕조~제6왕조의 왕묘. 거대한 3 개의 피라미드를 비롯해 모두 9 개의 피라미드가 있다.
피라미드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기록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BC 5세기)의 <역사 signtimesp=14359 designtimesp=12265> 권2에 있다.
그는 기자의 대(大)피라미드에 관하여 10만 명이 3개월 교대로 20년에 걸쳐 건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쿠푸는 카이로 남서쪽 15 km에 위치한 기자에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대피라미드 또는 제1피라미드라 일컬어지며, 높이 146.5 m(현재 137 m), 저변 230 m, 사면각도는 51 °52 '이다.
각 능선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오차는 최대의 것이라도 5 °30 '에 지나지 않은 만큼 극히 정교한 것으로, 피트리에 의하면
평균 2.5 t의 돌을 230만개나 쌓아올렸다.
진정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로서 그 장대한 규모와 간결한 미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내부구조는 복잡해서 독일의 보르하르트에 의하면 계획이 2번 변경되었다고 한다.
북측의 지면에서 약간 위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그대로 하강하면 암반 밑에 설치된 방에 도달한다.
이곳이 제1차 계획의 매장실이고, 그 위에 있는 통칭 ‘왕비의 방’이 제2차 계획의 매장실이다.
그리고 제3차 계획에 의해 피라미드는 완성되었다. 제1피라미드 남서쪽에 카프라왕의 제2피라미드가 있다.
높이 136 m, 밑변 216 m, 동쪽에 있는 장제신전에 450 m의 참배로가 뻗어 하곡신전에 이른다.
유명한 스핑크스는 하곡신전에 가까운 참배로 북쪽에 엎드려 있다.
기자에는 그 밖에 멘카우레왕의 제3피라미드와 왕족들의 소(小)피라미드 6기가 있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
캄보디아 서북부에 12세기 초 돌로 만든 왕실 사원. 주요 건물은 중앙 사당과 이를 둘러싼 삼중의 회랑 앙코르는 크메르 어로
"도시 또는 수도", 와트는 태국어로 "사원'을 뜻한다.
서기 802년부터 1430년경까지 크메르 왕국의 중심이었던 거대한 사원이다.
앙코르와트의 유명세는 단순히 "엄청나게 크다"가 아니다.
사원은 단일설계도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믿기엔 공사기간이 너무 길었고 30년간 수없이 변경되고 증축되었을 텐데도 초기의
설계에 어긋남이 없이 하나의 건축물로서 완벽함을 자랑한다.
배치도 대칭도 구조도 조화도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앙코르와트는 사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다양한 건물들의 결합체이다.
갤러리, 방, 별실, 사당, 탑, 정원, 중정, 연못, 성벽,탑문 등등..... 어느 하나도 구색갖추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라 있어야할
곳에 놓여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건축 완성도가 퍼펙트하다고 칭송 받는다.
사원은 3층 구조에 총 높이가 65m, 단순히 계산하면 한층당 높이가 26m나 되지만 이런 계산은 적용되지 않는다.
1층과 2층의 기단이 동일 평면에 위치하고 이층에서 3층 기단까지 약 40m의 높이로 올려져 있으며 그 사이에는 중간단이란
독특한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
아무튼 특이하고 신기하다. 배치 구조도 독특하지만 빈공간이나 빈틈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갖은 부속물로 메우고
연결시킨 공간배치기법이나 수학 계산, 미술적 감각이 총망라되어 있다.
자칫 빈공간으로 남기 쉬운 외벽에는 무려 1,500명 이상의 압사라(천녀)들을 새겨 마치 빈신전이 아닌 번성하는 신전임을
느끼게 한다.
압사라는 단 하나도 동일 인물을 찾아 볼 수 없는 섬세함과 다양성의 표현체이다.
넓이와 높이의 배율을 맞춰 경사도 가파른 계단으로 높은 층의 공간을 메운 기법도 그러하고 중간층이란 기묘한 기법으로
공간을 메꾸어 상하층을 연결하는 기법 또한 그 옛날의 기술이라고는 믿기지 않은 참신한 아이디어이다.
무엇보다 성소탑들. 사각형의 기단에서 시작, 자연스럽게 원추형으로 변형을 시도하여 결국 전체적으로 한송이 연꽃 모양으로
피어나는 탑의 빼어난 미는 앙코르와트 건축 양식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리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테네의 언덕. 동서 약 270 m, 남북 약 150 m. 서쪽 입구를 제외한 다른 세 방향은 가파른 절벽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있으며, 주요관공서와 종교건물들이 모여 있다.
도시건설이 원래 종교적 행위였기 때문에, 그리스의 도시계획에서는 신들을 위한 집을 짓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요소였다.
종교뿐 아니라 군사적 관점에서 보아도 언덕 위는 가장 바람직한 자리였다.
아크로폴리스는 요새였으므로 군사적으로 유리했고, 언덕은 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자연의 신비(동굴·샘·숲·골짜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도 적합했다.
아테네에는 BC 5세기 후반에 세워진 가장 유명한 아크로폴리스가 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바위투성이 언덕에 있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이 도시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을 위해 지어졌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축물은 성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프로필라이움, 아테나 여신을 모신 신전이며 델로스 동맹의 보물 창고인
파르테논, 농업의 신들(특히 에릭토니오스)의 신전인 에렉테움, 그리고 도리스족과 이오니아족이 아테네 정부 치하에서 화목하게
사는 것을 상징한 건축인 아테나 니케 신전 등이다.
말리 Timbuktu City
나이저 강과 가까운 호숫가에 위치한 역사 도시. 유럽에는 오랫동안 ‘환상의 도시’로 알려져 있었음.
러시아 모스크바 성 바실리 성당
성 바실리 사원은 몽고 타타르족의 압제를 벗어나 러시아 민족이 해방을 맞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이반 4세의 명령으로 지어
졌습니다.
러시아의 건축가인 바르마와 보스또니끄를 시켜 1555 ~ 1560년 사이에 걸쳐 5년만에 짓도록 했으며 승리의 중재자인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진 사원입니다.
하나로 통일된 러시아의 기치를 드높이고 몽고 타타르와 용감하게 싸우다 희생된 민족 영웅들의 넋을 기리며 러시아 정교로
국민들을 통합시키고 애국심을 북돋기 위해 건축 된 정치적, 종교적 상징물입니다.
이반 4세는 러시아를 통일시키고 최초로 짜르(황제)에 오른 인물인데 폭군으로 악명높죠.
그래서 '공포의 이반'이란 뜻의 '이반 그로즈니'(이반 뇌제)라 불립니다.
이반 4세는 너무나 아름다운 성 바실리 사원이 완성되자 다른 나라에 이런 멋진 건축물이 들어서면 안된다는 욕심에 다시는
건축을 하지 못하도록 바르마와 보스또니끄의 눈을 뽑아버렸다는 얘기가 전해져 옵니다.
이반 그로즈니란 이름답게 그의 포악하고 잔인한 일면을 드러낸 유명한 일화입니다.
지구인의 게임 테트리스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 사원이 처음부터 성 바실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고....
1588년 탁발 수도사인 바실리가 이 곳에 묻히게 되면서 그 이름을 따서 성 바실리 사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군요.
모스크바 화재 및 이반 4세의 앞날을 예언한 것으로도 유명하고 이반 4세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의 죽음을 슬퍼한
이반 4세가사원의 이름을 지었다고도 합니다.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
알람브라 궁전(에스파냐): 에스파냐의 그라나다에 있는 이슬람 왕국의 궁전. 13세기에 창건되어 14세기 말에 완성 알람브라
궁전은 아랍어 말 그대로 "붉다"라는 뜻을 지닌 궁전과 성곽의 복합단지이다.
스페인 남부의 그라나다 지역에서 머물던 아랍 군주의 저택이었던 곳으로 그라나다 시의 남동쪽 경계에 있다.
현재에는 이슬람 건축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르네상스식 건물이 신성로마제국의 찰스 5세 때 추가되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우리말로는 알함브라 궁전이라고 쓰는 경우가 많지만 알함브라는 영문 식으로 그냥 읽는 경우이다.
아랍어가 스페인어로 굳어져서 쓰이고 있는 Alhambra라는 이름은 스페인어에서 h가 묵음이므로 "알람브라"라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우리말로 옮겼을 때 공식명칭은 알함브라 궁전이 아닌 알람브라 궁전이다.
전체 궁전은 해발 740m의 고원에 위치하는데 너비는 205m에 달한다.
서북서, 동남동의 방향으로 건물이 뻗어 있으며 전체 면적은 142,000 m²이다.
견고하게 쌓아진 벽이 있으며 주위에는 13개의 타워가 있다.
다로 강이 흘러가며 깊은 골짜기를 이루며 그라나다 지역을 양분한다.
아사비카 계곡이 있으며 주위에는 알람브라 공원이 남서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영국 스톤헨지
영국의 솔즈베리 근교에 돌기둥이 말굽 모양으로 늘어 서 있는 고대의 거석 기념물.
BC 1900년~BC 1500년경 건축된 것으로 추정.
세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환상열석(環狀列石) 가운데 가장 유명한 건조물의 하나인 스톤헨지(StoneHenge)는 영국 남부
솔즈베리 평야(Salisbury Plain)에 위치하며, 고대 영어로 '공중에 걸쳐 있는 돌'이라는 의미이다.
천년전 이 곳엔 초기 석기시대 사람들이 정착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별 흔적을 남기진 않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유적들은 청동기인들의 업적이다.
스톤헨지의 건조가 착수된 것은 기원전 2800년경이며, 우리가 보고 있는 형태로 완성된 것은 기원전 156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톤헨지는 원형(圓形)의 유적으로 각각의 거석들은 모두 한 중심점을 향해 원형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바깥 도랑과 둑, 네모꼴
광장과 방향표시석인 힐스톤, 돌기둥을 세워 놓은 입석군(立石群), 중앙 석조물 등으로 이루어졌다.
기원전 2100년경 스톤헨지로부터 자그마치 385km나 떨어진 웨일즈 남서부의 프레슬리산에서 청석(blue stone)이 이 곳으로
운반되어져 왔는데, 최고 5톤까지 나가는 이 돌들을 옮기는 일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썰매나 뗏목을 이용해 육로와 해상을 번갈아 가며 운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스톤헨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방향표시석 힐스톤은 동쪽을 가리키는데, 그것도 하지(夏至)에 해가 뜨는 방향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다.
하지날 힐스톤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해가 떠올라 중앙제단을 비췄던 시기는 천문학적으로 BC 1840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다.그리고 힐스톤을 세운 시기를 과학적으로 측정한 연대와도 맞아 떨어져 기묘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터키 이스탄불 성소피아 사원
이스탄불에 세워진 초기 비잔틴 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 흔히 ‘성 소피아 성당’이라 부른다.
터키어로는 Ayasofya. 성 소피아 사원, 신성한 지혜의 교회(Church of the Divine Wisdom)라고도 함.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지휘로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진 교회.
비잔틴 제국은 동로마 제국을 말한다.
현재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의 옛 이름인 콘스탄티노플에 도읍을 정한 동로마제국은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뉘게 된 395년부터
1453년 오스만튀르크의 술탄 메메트2세의 침략으로 멸망할 때가지 약 1000년 넘게 지속된 제국이다.
동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한 서로마제국 이후에도 1000년을 더 존속하였다.
성소피아 성당이 건립되었을 당시 이름은 하기아 소피아(Hagia Sofia)였다.
터키 사람들은 아야 소피아(Aya Sofia)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의미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지혜라는 뜻으로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현존하는 성소피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다시 지어진 것이다.
4세기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 후계자 시대에 건조된 성당이 532년의 반란으로
파손된 뒤,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새로운 설계에 근거해 재건을 시작했다.
세계 4대 교회 건축물로 손꼽힐 만큼 아름다운 성소피아 성당의 개장식은 대단히 화려했으며, 황제가 내부의 화려함을 보았을 때,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 당시, 성소피아 성당은 황제 대관식, 또는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등의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성소피아 성당은 아름다움만큼이나 고난이 많은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레오 3세 황제가 성상의 숭배를 금하는 칙령을(성상금지령)을 발하면서 성소피아 성당의 많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들이 손실됐다.
또한 1204년에 일어난 제4차 십자군 전쟁 때는 십자군들의 약탈 대상이 되고, 그 후에 제작된 모자이크도 15세기 이후 이슬람교인
오스만튀르크의 점령하에 거의 없어져 버렸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비잔틴 제국의 대표적인 성당으로 자리 잡은 성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로 바뀌기도 한다.
비잔틴을 정복한 술탄 메메트2세는 대부분의 성당을 파괴하였으나 성소피아 성당의 위용과 아름다움에 반해 파괴하지 않고
성당을 모스크 사원으로 변모시키도록 지시한다.
결국 성소피아 성당은 그리스도교의 특징을 보여주는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 벽화에 이슬람교 코란의 금문자, 미나레트 등이
동시에 뒤엉켜 탄생한 새로운 예술적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성소피아 성당을 더욱 빛나게 하는 또 하나의 건축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소피아 성당의 맞은편에 있는 블루 모스크이다.
사원의 내부가 중국풍의 청색 타일로 장식되었기 때문에 일명 블루 모스크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모스크의 원래 이름은 술탄 아멧 모스크이다.
술탄 아멧 1세가 성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모스크를 세우도록 명령하는 바람에 성소피아 성당 맞은편에 웅장한 규모로 1609년
부터 건립된 사원이다.
일반적인 이슬람 사원에 있는 첨탑은 2개나 4개인 데 반해 이 사원은 특이하게 6개이다.
이 아름다운 모스크는 기둥과 돔 벽에 명암이 있는 99가지의 푸른 타일을 사용함으로써 더 유명해지게 되었다.
현존하는 터키 최대의 이슬람 사원으로 성소피아 대성당과 맞먹는 규모지만 건축학적인 아름다움은 성소피아 성당을 능가한다고 한다. 성소피아 성당과 더불어 이스탄불 최대의 명소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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