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야기들/드라마 이산 역사속인물

사도세자는 왜 비극을 맞았는가 ..... [2008/01/31]

이미피더 2009. 3. 12. 00:57

 

 

최근 시청률 30%를 넘나들며 연일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이산>(연출 이병훈 김근홍, 김이영)은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이어지는 이야기가 주요 소재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드라마 소재가 될 정도로 극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지난 주에 방영된 38회 분에서 영조(이순재 분)는 자신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이창훈 분)의 묘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며 후회를 하고 39회 방영분에서는 세손인 이산(이서진 분)에게 양위 의사를 밝히면서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무리들을 찾으라고 한다.


그렇다면 영조는 왜 사도세자를 죽였던 것일까?


아무리 사도세자가 역모를 꾀했다는 증거가 명백했다고는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아들인데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할

정도로 가혹한 처사를 보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 역사적으로 그 이유를 따지자면 그 시기가 상당히 거슬러 올라가고 복잡하다는 데에 우선 놀라게 된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당파가 조성되고 그 당파 간의 분쟁이 결국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게 되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숙종의 총애를 받은 영조와 갈라지는 서인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는 영조


사도세자의 비극이 생기게 된 이유를 찾는다면 조선 숙종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남인과 서인이 대립하던 숙종 시기에 조정에서의 두 세력의 대립 원인은 남인을 대표하는 장희빈과 서인을 대표하는

인현왕후의 갈등이었다.


숙종은 자신의 두 여자를 매개로 남인과 서인을 번갈이 기용하며 왕권을 강화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말년에는 장희빈을

죽이고 갑술환국을 일으켜 남인을 몰락시킴으로써 서인의 득세를 용인하여 주고 남인의 비호를 받고 있던 세자(장희빈의 아들로

훗날 경종)를 배척했는데, 그것이 사도세자 비극의 기원이었다.


원래 숙종은 세자를 폐하고 최숙빈의 아들인 연잉군(훗날의 영조)과 박명빈의 아들 연령군 중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

이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인들에게 세자가 아닌 연잉군과 연령군을 맡긴다는 유조를 남기고 승하를 하게 된다.


이에 서인들은 이를 세자가 아닌 연잉군에게 보위를 넘기고자 하는 숙종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새로 왕위에 오른 세자인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서인들도 이 경종을 두고 두 파로 갈라지게 되는데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는 온건 소론과 경종을 왕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던 강경 노론이 그것이다.

 

 

경종의 의문의 죽음과 영조의 등극


경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노론의 압력에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고 이듬해 왕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주청하는 노론의

요구마저도 들어주게 된다.

갓 등극한 왕에게 이복 아우를 왕세자도 아닌 왕세제로 책봉하게 한 것은 명백하게 현재의 임금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선언이었으며 이어지는 대리청정의 요구는 현 임금에게서 나오는 왕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경종 등극 2년까지 왕세제 연잉군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던 노론에 맞서 소론이 반격을 시작하는데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주장이 왕권을 무시한 반역이라 규정하며 노론의 4대신을 탄핵한 1722년의 '신임사화'가 그것이었다.


이 사화로 노론과 연잉군은 큰 고비를 겪게 되고 소론이 잠시 득세하게 되지만 아우를 사랑하는 경종의 마음을 움직인 연잉군은

목숨을 보존하게 되고 2년 뒤인 1724년 경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연잉군은 영조로서 등극하게 된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을 똑같이 기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게 되는데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은 당연히 그와 생사를 같이 했던

노론과 함께 하였고 소론은 언제나 그의 목숨을 위협했던 신임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사도세자의 탄생과 부자간의 반목

영조가 등극하고 25년이 되던 해에 영조의 장자였던 효장세자가 세상을 떠나는데 이후 꼭 7년 만에 사도세자가 태어나게 된다.

영조는 늦둥이인데다가 외아들인 사도세자를 너무 사랑하여 어린 시절부터 그의 총명함을 '왕자의 재능'이라며 추켜세웠고

소론과 노론 역시 유일한 왕의 후계자를 아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성장하면서 왕인 영조와 신하인 노론과 소론의 힘겨루기를 지켜보았고, 노론과 소론이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마다 펼쳐지는 양위소동에서 영문도 모르고 석고대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는 영조와 야당파가 주연하는 일종의 정치적인 쇼에서 비중은 있지만 뚜렷한 역할이 없는 조연을 담당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반복은 사도세자로 하여금 근본적 원인을 파헤치게 만들었다.


이후 소론과 노론의 관계와 영조와 숙부인 경종의 관계를 알게 된 사도세자의 노론에 대한 반감은 날로 커져간다.

또 영조가 툭하면 양위소동을 벌이며 '경종이 자신을 대단히 사랑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정말로

백부를 독살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사도세자의 이런 반노론 성향은 노론은 물론이고 노론의 힘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영조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고

이후에 이루어지는 세자의 모든 정치적 행보는 영조에게는 감시해야 마땅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조의 탄생과 사도세자의 죽음

 

 

사도세자가 사망한 것은 1762년으로 그의 나이 28세 무렵이었다.

왕세자로서의 기량과 도량이 이미 당시의 임금인 영조를 뛰어 넘어 백성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며

노론을 견제하고 소론과 남인을 신임하던 사도세자의 죽음은 어쩌면 그가 죽기 10년 전 그의 적자인 산(혜경궁 홍씨 소생의

차자로 훗날 정조)이 태어나면서 예견되었는지도 모른다.


영조가 과거 신임사화 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경종을 제외하고는 왕위를 이을 자손이 그밖에 없었던 이유가 컸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조에게도 아들이 사도세자밖에 없는 상황에서 만약 정조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사도세자는 어쩌면 영조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대안으로 어린 왕세손이 있었던 것은 오히려 아들 사도세자의 목숨을 재촉하게 되었다.

결국 사도세자는 그렇게 뒤주에 갇혀 너무 뛰어난 왕재이고 노론을 신임하지 않았다는 묵시적 죄목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노론은 다시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 이산마저 죽이려 하지만 이번에는 영조가 세손을 보호하게 되고

이산은 할어버지의 비호 아래 무사히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로 등극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전에 영조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것을 뒤늦게 후회한다.

 

<출처 - 오마이뉴스 유상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