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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벌써 자립생활 3년차입니다” ..... [2008/05/10]

이미피더 2009. 4. 18. 00:36

 

 

                자립생활센터 동료들로부터 용기 얻어 독립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는 역시 ‘가족’

제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자조모임 활동을 하고 있는강윤미씨가 자신의 집에서 동료들과 자조모임을 갖고 있는 모습.

                                                                   ⓒ제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

 

 

[내집 마련 수난기]      ⑦제주시 도련1동 강윤미(여·41)씨

 

제주도의 남쪽으로 간 육지의 끝.

일 년 열두 달 비리고 짭짜름한 갯내음이 흐르는 바닷가 마을의 평범한 아낙인 우리 어머니는 나면서부터 ‘장애인’이라고 떡하니 온몸에

도장박고 뱃속에서 떨어진 나를 아침에 누여둔 그대로인 채 배가 고파도, 기저귀가 젖어도 기력 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는 걸 들여다

보고서야 겨우 앉아 젖을 물려볼 수 있었다고 지금도 눈을 붉히신다.

 

“이모는 왜 무릎으로 기어 다녀요?”

언니가 결혼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조카들이 집으로 와 함께 지내던 어느 날. 내가 일어서지 못하고 무릎으로만 집안을 기어

다니는 게 이상했던 지 유치원을 다녀와 간식을 먹고 있던 조카가 말간 눈을 동글동글 굴리며 물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 대답도 못 했다.

‘게메이?’(글쎄)라는 당혹스러움만 내 가슴속에 남겨둔 채. 그때까지도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문이 되지 못했던 당연한 일상이었다.

 

내게 장애는 당연한 것.

내 몸과 하나라는 것을 묵인하던 어른들과는 다른 아이의 눈을 통해 ‘왜’라는 것을 알게 된 충격은 한동안 가족과도 서먹해질 만큼 어려운

시기였다.

 

그렇게 힘든 시기에 알게 된 게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곳은 ‘제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 어렴풋하게나마 내 장애에 대해서, 또 나이가 들어가는 어른으로서

해야 하는 당연한 그 무언가를 가슴속에서 상기시키고 있을 무렵 알게 된 그 곳에서 나는 또 다른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성인장애인야학.’ 식구들의 등에 업혀 다니며 겨우 초등학교를 마치자 집안이 기우는 바람에 언니는 남의 집 살이를 하며 겨우 학교를

다니는 형편에 학교를 가겠다고 발버둥 칠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자립생활센터에서 운영하는 야학을 다니면서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에 대한 많은 고민들과 서로의 경험담들을 나누고, 자립

생활을 하고 있는 장애인들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들에서 나도 ‘자립’을 해보고 싶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

 

자립생활을 하겠다고 마음을 굳히자 의외로 많은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크게 다가왔다.

어쩌다 한 번 외출할 때면 내 손에 용돈을 쥐어주는 어머니의 쌈짓돈이 전부인 내게 자립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장애인복지관에서 6개월 정도 근무할 수 있는 일자리를 소개받아 하게 됐다.

그 일을 하면 자립생활을 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욕심에 사회경험이라고는 없던 내가 생전 처음 비장애인들

사이에 앉아 그들과 일을 한다는 그 것만으로도 긴장되고 주눅이 들어 말도 건네기 힘들어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두 마디만

하고 지내는 날이 많았지만 돈을 모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단 하루도 빠질 수가 없었다.

 

자립생활센터에서 간사로 있던 분의 도움으로 주택공사에서 임대하는 서민아파트에 가족들 몰래 신청을 한 게 당첨이 됐지만 사실

비용을 마련할 방법이 없던 내게 그 돈은 비록 천만 원이 넘는 아파트보증금을 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한 달 한 달 통장을

확인할 때마다 불어나는 숫자는 혼자 살겠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던 나에게 “독립하고 싶다”는 말을 꺼낼 수 있는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가족들에게 “독립하겠다”라는 말을 하고부터 이사하는 날까지 나는 가족과 힘든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왜 혼자 살려고 하느냐”에서 시작된 걱정은 “어떻게 살 거냐”, “안 된다”는 반대에 부딪히며 부모님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때, 동생이 중간에서 “언니도 서른이 넘었는데 독립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설득했고 거기에 언니도 거들어 힘들게 막내 동생과 함께

사는 것으로 부모님은 마지못한 허락을 하시고 어머니는 부족한 아파트 계약금을 마련하느라 급전을 빌려 내손에 쥐어주면서 붉은 눈가를

훔치고 긴 한숨을 내쉬기만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서도 나 혼자만의 공간을 마련했다는 설렘에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그 첫날밤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눈보라가 치는 명절을 며칠 지내고 난 어느 날 밤. 동생들과 부모님의 손을 빌어 이삿짐을 옮겨 정리하고 보잘 것 없이 차려진 된장국

한 사발과 밥 한 그릇을 나눠먹고 가족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 남은 나는 정말 혼자가 되어 있었다.

 그때가 내 나이 서른아홉이 되던 때였다.

 

그렇게 가족들과 헤어져 나와 ‘독립’이라는 중증장애인의 가장 큰 꿈인 ‘자립생활’을 꾸리게 된 지 꼽아보니 벌써 3년이 되어있다.

하지만 3년 전 그 때, 내가 그렇게 가족들에게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많은 이유들 중엔 예기치 않았던 취업의 기회, 또 용기와 격려를 주었던

자립생활센터의 고마운 친구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인 내 가족들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 지, 그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한 노력들을 내가 감수할 것인지를 먼저 아는 것이다.

만약 원하는 것이 진정 ‘나의 것’이라면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다.

내가 절박한 만큼 나는 그것을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기 때문에….

기고/강윤미 ( ablenews@ablenews.co.kr )

[출처 - 에이블뉴스]